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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발전사

백병원은 일제하의 암울한 시기에 백인제(白麟濟, 1899 출생)라고 하는 한국 의학계의 걸출한 의사의 집념과 능력으로 척박한 의료현실 속에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해방과 분단ㆍ 전쟁과 개발독재로 이어진 격동의 한국 근대사의 파고를 넘어 2014년 현재 서울ㆍ부산ㆍ상계ㆍ일산ㆍ해운대백병원 등 5개 병원 3500여 병상 규모의 한국 사립병원의 대표적 주자로 성장하였다.

백병원의 역사는 단순히 일개 병원의 발전 과정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 한국 사립병원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 그대로 한국 근대 사립병원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 1.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
  2. 2. 1932년 ‘백인제외과의원’ 개원
  3. 3. 국내 최초의 개인병원의 재단법인화
  4. 4. 민간병원 최초 ‘백병원 혈액은행’ 개설
  5. 5. 현대화 바람과 위기의 서울백병원
  6. 6. 서울백병원, 모체 병원으로 토대를 세우다
  7. 7. 인제의대의 설립과 부산백병원 개원
  8. 8. 부산백병원을 만든 사람들
  9. 9. 인제대학교,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기까지
  10. 10. 86·88대회 선수촌 전담병원 성공
  11. 11. 상계백병원의 탄생
  12. 12. 이혁상 교수팀, 국내 최초 성인 간암환자 간이식 성공
  13. 13. IMF, 그리고 일산백병원의 개원
  14. 14. 동래백병원의 개원과 폐쇄
  15. 15. 동북아시아 의료허브, 해운대백병원

1.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

백인제 박사는 1899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재학 중에는 3·1 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후 복학이 허용되어 1921년 경성의전을 수석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주지 않았다. 결국 2년동안 총독부의원에서 무보수로 일한 후에야 의사면허(제537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경성의전 외과교수를 역임했으며, 1928년 조선인 최초로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식민지의 청년이 실력 하나로 그 당시 의학계에서 인정받은 대사건이었다.

백인제 박사는 우리나라 현대의학, 특히 내장외과와 수혈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간 선구자였다. 그는 1937년 상부 장관을 복벽(腹壁)에 유착시켜 장루(腸瘻)를 형성해 줌으로써 장관을 감압(減壓)시켜서 폐색된 부분을 통하게 한 성공사례 7례를 보고하였다. 세계 최초로 상부장관(上部腸管)의 감압술(減押術)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렇듯, 백인제 박사는 진단과 수술이 정확하여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만주에까지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백인제 박사 앞에 백인제 없고, 백인제 박사 뒤에 백인제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뛰어난 명의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의술을 통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민족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직분을 활용하여 후학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백병원을 세웠고,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

[사진설명]
① 백인제 박사는 1928년 4월 토오꼬오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에 통과하고 같은해 6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유일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경성의전 주임교수가 되었다. 사진은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것이다.   ② 서재필 박사 귀국 직후 백인제 박사 자택에서 기념촬영, 뒷줄 5번째가 백인제 박사   ③ 백인제 박사

1932년 ‘백인제 외과의원’ 개원

특출한 의사였던 백인제 박사는 그의 스승 우에무라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우에무라 준지(植村俊二)는 1916년 우리나라에 와서 총독부의원의 외과과장을 지내다가 1924년 지금의 서울백병원 자리에 자신의 병원을 세워 8년 정도 운영하였는데 부인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고향인 나고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에 병원을 인계받을 적임자를 찾던 중 경성의전 학생시절부터 총애하였고, 특히 총독부의원에서 능력과 인품을 확인하였던 백인제 박사에게 병원을 넘기기로 한다. 당시 교수였던 백인제 박사의 수중에 병원을 인수할 만한 거금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조선식산은행(현 조흥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30병상 규모의 외과병원을 인수할 수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병원 인수한 후에 후배 이병훈 박사로 하여금 병원을 경영하게 하고, 당신은 계속 교직에 계속 남아 있었다. 백인제 박사가 직접 병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1941년,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침략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던 해였다. 한국은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있었고, 그리고 인수한 병원의 빚도 갚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남의 전쟁통에 끌려갈 일밖에 없다. 더 이상 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 큰아버지는 미련없이 의과대학의 외과과장 자리를 박차고 개업의로 첫발을 내딛었다. 1941년 1월부터 ‘백인제 외과의원’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뒤 12월에는 공식적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직했다. 김희규, 주영재, 유덕선 박사 등 후배, 제자들이 의료진으로 동참했다.

백인제 박사가 개업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미 조선팔도에 백인제 박사의 명성이 자자했을 때라 들것에 들려온 맹장환자나 잘 걷지 못해 업혀왔던 자가 멀쩡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백인제 박사의 의술에 감탄하곤 했다.

병원은 언제나 환자들로 붐볐다. 개원 초기에는 30여개였던 병상은 연일 꽉 차서 병원에 인접한 주택을 병실로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백인제 외과의원은 날로 번창하여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4년 동안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조선팔도나 만주에서 연일 몰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병원을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백병원은 해방후 주변의 적산가옥을 인수하였는데, 병원과 맞닿아 있던 키따노(北野)치과의원, 사까이(西井)산부인과, 와따나베변호사 사무실 등을 모두 인수함에 따라 외관상 병원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최대 100병상까지 확대하여 해방직후 사립병원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사진설명]
①백인제 박사가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주임교수로 내정되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1928년3월 12일자)   ②일본인 간호사 마루따의 귀국의 기념하여 찍은 사진 수술실과 진찰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③백인제 박사 임상강의 모습. 한국인 학생들은 물론 일본인학생들 사이에서도 진단의 정확함과 대담하고도 정확한 수술, 그리고 명쾌한 강의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국내 최초의 개인병원의 재단법인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백인제 박사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선각자다운 면모를 보인다. 그동안 병원을 하면서 모았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46년 12월 1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이사 겸 초대 원장에 백인제 박사, 상무 겸 부원장에 김희규 박사, 재단 설립 당시는 물론 백인제외과병원 개원때부터 백인제 박사의 행정적, 법률적 자문을 맡아왔던 백붕제 변호사, 그리고 박사의 경성의학전문학교 후배이며 성모병원 원장으로 봉직했던 박병래 박사,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였던 기용숙 박사가 이사로 선입되었으며, 감사는 공병우, 백기호 박사로 구성되었다.

정관에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아래 인술로서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연구와 교육,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을 통해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설립의 취지를 밝혔다. 바로 이 뜻을 받들어 1979년에 인제대학이 설립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가진 자들의 베풂에 대한 사회적 책임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후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이런 나눔의 실천이 지금의 인제학원과 재단법인 백병원까지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인제 박사의 백외과의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화는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강철왕 카네기가 카네기재단을 설립하고 석유왕 록펠러가 록펠러 재단을 세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범을 보인 것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인제 박사는 병원을 재단법인화한 후 의료뿐만 아니라 경제ㆍ문화ㆍ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경제 방면에서는 조선산업진흥주식회사를 통해 무역업에 관여하기도 했고, 문화 방면에서는 1947년 10월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열어 책 20여권을 출판하였고, 변호사인 동생 백붕제로 하여금 수선서림이라는 서점을 경영하게 하였다.

정치 방면에서는 1948년 5ㆍ10총선거에 스스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기도 했으며, 1948년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모든 실험적 활동이 백인제 박사가 꿈꿔왔던 메이요 클리닉의 창설을 위해서 어떤 자양분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백병원은 큰 어려움에 맞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였고, 백인제 박사는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백인제 박사가 개업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개원 초기에는 30여개였던 병상은 조선팔도와 만주에서 연일 몰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병원을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최대 100병상까지 확대하여 해방직후 사립병원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백인제 박사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선각자다운 면모를 보였는데, 1946년 12월 1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 설립하였다.

1954년 국내 민간병원 최초 ‘백병원 혈액은행’ 개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혈액은행이나 보존혈액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 채혈자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했고, 채혈자의 혈액을 링거씨액에 희석 여과한 후 보온하면서 수혈하였다. 그러나 이 수혈방법은 오한, 전율, 발열 등의 부작용 때문에 점차 직접수혈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즉, 채혈자로부터 직접 주사기로 채혈하여 바로 환자에게 수혈하는 방법이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번째 연구인 「일본ㆍ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등을 비롯하여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는 등 백인제 박사는 수혈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子)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경의전 외과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외과전문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백인제 외과의원에는 하루 평균 4∼5건, 많을 때는 10여건 이상의 개복수술 환자가 있어서 언제나 혈액수급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이러한 혈액수급의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윤덕선 박사를 미8군 121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은행 실무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백병원 1층에 있던 검사실에 붙여서 혈액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병원 혈액원이다.

처음에는 미군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을 얻어다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차차 매혈로 자체수요를 확보해 나갔다. 채혈과 검사 및 조작 등은 모두 윤덕선 박사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며, 후에 검사실에 근무하는 요원들을 훈련시켜 일을 맡겼다.
혈액원의 시설은 혈액을 채취해서 보관하고 검사하는 최소한의 시설 밖에는 없었고 그나마도 정전(停電)이 잦아서 혈액이 변질될까봐 애를 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립혈액원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시내 병원들에 필요한 혈액을 충분히 공급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백병원 혈액원에도 일반 병원들의 혈액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당초 백병원 혈액은행의 설치의 목적이 자체에서 소요되는 혈액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나 할 수 없이 다른 병원에게도 다소의 혈액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백병원의 혈액원은 국립혈액원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사립병원의 혈액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정부에 의해서 1954년 6월 7일에 국립혈액원이 개설되기 앞서 1954년초 민간병원으로서는 백병원에서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이다.
대개의 병원들이 국립혈액원, 그 후에는 적십자혈액원에서 필요한 혈액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데 비해, 한 외과 전문의를 훈련시켜 혈액은행을 개설하고 자체에서 직접 혈액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해결방법을 택한 백병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다른 사립병원 혈액원들의 표본이 되었다.

병원 현대화 바람과 위기의 서울백병원

오랜 우리 민족사 중에서도 한국전쟁은 가장 참혹한 시련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다. 1952년의 백병원은 설립자 백인제박사가 납북되자, 존립이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백병원의 옛 영광을 지키며 명성을 유지하기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백병원은 1950년대 중반까지도 김희규 박사를 정점으로 윤덕선, 전현오, 신현구, 백낙환으로 이어진 강력한 진료 팀을 자랑하였다. 요사이는 정형외과에서 다루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대퇴경부골절(大腿頸部骨折)에 대한 골수강내(骨髓腔內) 정(釘) 고정 수술을 윤덕선, 백낙환 박사가 미흡한 여건 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실시하던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백병원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병원이 중소병원 규모의 현상유지에 그쳤던 반면, 서울 곳곳에서는 신생 대규모 종합병원이 신설되었다. 이미 1950년대에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졌고, 길 건너편 명동 입구에 1962년 명동 가톨릭 성모병원, 1968년 필동 성심병원이 세워졌으며, 을지로 5가에 국립의료원이 신축되어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지역에만 이미 17개 사립병원과 69개의 병원이 들어섰다.

백병원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병원 건물이었다. 노후하여 병원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한계에 도달해 건물 여기저기 비가 새고, 진찰실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는 상태였다. 병원의 중흥(中興)을 위해서는 최소한 300병상을 가진 연건평 5,000평 이상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야 되는데 이는 당시의 백병원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욱이 유능했던 의료진이 하나씩 병원을 떠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61년 1월 백낙환 원장이 직무대행으로 백병원의 운영을 맡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현대식 종합병원을 지어 제2의 도약을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백병원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실천한 일은 몸집 줄이기였다. 솔선수범하여 월급을 적게받고, 병원신축을 위한 자금을 적립했다. 또한 기존 일반외과 중심의 백병원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종합외과병원으로의 전환을 꾀하기 시작했다. 일반외과 뿐만 아니라 부인과, 비뇨기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단순개두술) 등에 전문의를 두었다.
또한 내과, 소아과, 정신과,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여섯개 과는 지입제(持入制)로 두었다. 지입제란 종합병원 내에 개인이 전세를 드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고육지책이었다.
백병원의 재정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2년 후에는 지입제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서울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백병원의 특성을 고려해 연중무휴, 24시간 가동하는 응급의료센터를 통해 응급실 환자 유치를 최대한 활용했다. 응급실에 오는 환자는 절대로 돌려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 병원의 전통으로 지금도 5개 백병원 모두에서 지켜지고 있다. 응급실의 활약으로 수익증대 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가 활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생동감 있는 병원, 젊은 병원’이라는 내용으로 광고를 했는데, 1963년 5월과 7월 사이에 조선일보에만 총 22회의 광고를 게재했다. 진료실에서 회전의자만 돌리며 환자를 만나는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난 적극적인 마케팅이다.

[사진설명]
①당시 의료진들과 기념촬영   ②1963년 조선일보 광고

서울백병원, 모체병원으로 토대를 세우다

7~8년 동안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건축비용이 모였고, 백병원은 단과병원에서 종합외과병원으로 탈바꿈에 성공하여 예전의 모습을 어설프게나마 되찾아갔다. 하지만 주변에는 온통 최신식 빌딩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종합병원의 신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재단이사회를 소집, 1960년대 초부터 구상하던 재건계획을 구체화하여 1967년 종합병원 백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계획서를 작성하였다.

1970년 4월 1일 서울백병원의 현대화를 위한 착공에 들어갔다. 백낙환 원장은 수술과 외래진료 속에서 틈나는 대로 병원 설계도를 보고 밤낮으로 일했으며, 사촌동생인 백낙조 박사가 독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백병원이 악조건 속에서도 재건사업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상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함께 서울백병원 건설에 직접 뛰어들어 힘을 보탰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애초의 공사비를 초과하기 시작했을 뿐아니라 공사비에 충당하고자 했던 토지 매각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등 공사비 조달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건축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건설회사가 몇번인가 바뀌고 나서야 1972년 3월 7층까지 부분 준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의 재정적 어려움은 여전했고, 준공식은 초대장까지 모두 돌린 상태에서 부랴부랴 연기를 해야 했다.
그때까지의 건축비를 모두 마련하지 못하자 건설회사에서 병원의 모든 열쇠 전달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완불하지 못했던 건축비는 개원 후 성심성의껏 갚아 나가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야 열쇠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72년 3월, 7층까지 부분 준공하여 가사용 허가를 받고, 16개과 14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개원했다.

1973년에는 인턴 및 단과 수련병원으로 인정받았고, 1974년에는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교육병원으로 발돋움했다. 병원도 2단계로 8층, 1975년 3단계로 현재의 13층을 완성하였고, 이에 따라 병상 역시 300, 400, 500병상으로 늘려갔다. 이렇게 현재 지상 12층, 지하 2층의 서울백병원은 3단계로 나누어 장장 7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75년 3월에야 현재의 모습을 완공했다.

[사진설명]
①1970년 4월 1일 서울백병원의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   ②당시 백병원 공사현장 사진   ③우여곡절 끝에 1972년 3월, 7층까지 부분 준공하여 가사용 허가를 받고, 16개과 14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개원했다.

인제의대 설립과 부산백병원 개원

천신만고 끝에 1975년 서울백병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하고 현대화되자 수익도 증가했다. 우리는 올바르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운영함으로써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인정받았다. 서울백병원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제2의 도약을 계획하였다. 창립자 백인제 박사가 꿈꾸었던 교육 분야로의 진출이었다.

때마침 1977년 정부에서 민간병원의 건립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지방의 의료취약지구와 공단지역의 의료시설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의료기관에 행정ㆍ재정지원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당시의 다섯개 대형병원이 나누어 지방의료시설 확충에 참여하기로 하여 백병원은 부산 사상지구를 맡게 되었다. 그동안 의과대학 설립과 제2,제3백병원 건설의 기회를 기다리던 우리에게 정부의 이런 제안은 희소식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의과대학이 7개나 있었고, 전남지역만 해도 2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지만 부산·경남지역에는 부산의대 한곳 뿐이었다. 여러 곳을 답사한 끝에 현재의 개금동에 의과대학과 부속 부산백병원 부지를 장만하였는데 겨우 3,766평이었다. 지금은 지하철이 들어오는 등 변화가가 되었지만 당시의 개금동은 저소득층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인구밀도가 높고 질병환자가 많아 의료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고, 또한 사상공단과의 거리도 2~3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아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에도 부합되는 부지였다. 1978년 3월 보건사회부는 부산백병원 설치를 확정하고, 시설비 75억원 및 장비 150만 달러(150병상) 자원지원을 결정하였다. 이에 맞춰 백병원에서도 지하1층 지하9층 6,225평(500병상)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의과대학의 설립과 부산백병원 건설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8년 10월 문교부로부터 인제의과대학 설립계획이 승인되고, 1979년 1월 학교법인 인제학원 설립허가 및 신입생 80명 정원의 인제의과대학 설립인가를 취득하여 1979년 2월에는 80명 정원의 의예과 신입생을 후기로 선발할 수 있었다. 1946년 12월 17일 설립한 재단법인 백병원은 서울백병원과 부산백병원을 모체로 하는 학교법인 인제학원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아울러 백중앙의료원이 탄생하였다. 초대 학교법인 인제학원 이사장에 백낙조 이사장, 백중앙의료원 원장에 백낙환 이사가 선임되었으며, 초대 학장에는 창립자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 중 한분인 전종휘 박사가 취임하였다. 학교명칭은 인술로써 세상을 구제한다는 백병원의 창립이념인 인술제세(仁術濟世)의 仁字와 濟字를 따서 ‘仁濟醫科大學’으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창립자의 함자인 인제(麟濟)와도 음(音)이 같다.

한편, 부산백병원은 1978년 2월에 착공하여 대학병원 건축사상 최단 기간인 1년 4개월 만에 부분 준공하여 1979년 6월 1월 300병상으로 개원하였고 최하진 박사가 초대 원장의 어려운 직책을 맡아주었다. 많은 교직원이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매달린 값진 결실이었다. 서울백병원의 완공에 7년이 걸렸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백병원 교직원들의 잠재 역량이 얼마나 성장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설명]
①1978년 12월 2일 부산백병원 상량식   ②남측에서 바라본 부산백병원 전경   ③1979년 6월1일 인제의과대학 개교 및 부산백병원 개원식

부산백병원을 만든 사람들

1979년 6월 1일 부산백병원이 문을 열자 서울에서 유명한 백병원의 부산시대가 열렸다고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부산의대 부속병원 밖에 없던 부산에 신기원이 열린 것이다. 부산의 중환자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계기를 우리 백병원이 마련한 것이다. 환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백병원을 찾았다. 개원을 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서울백병원의 명성을 익히 아는 부산시민과 인근 양산, 김해 등지의 환자들 덕분이었다. 덕분에 부산백병원은 개원 첫해부터 흑자를 내면서 부산 최고의 병원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부산백병원이 부산에서 빨리 자리를 잡으려면 다른 병원과의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했다. 환자중심의 병원, 젊은 스태프들이 열성적으로 진료하는 것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전직원에게 친절교육을 시켰고, 진료비나 입원비에 연연하지 말고 ‘무조건 진료’의 원칙을 내세웠으며, 개업의 등과 연계도 잘 갖추어 놓았다. 그래서 개인병원이나 다른 종합병원에서 다루기 힘든 환자가 옮겨오는 경우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서울백병원 때부터의 원칙대로 응급환자는 절대 돌려보내지 않았다.

부산백병원은 명성대로 신경외과와 흉부외과 수술환자가 당시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 최다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시기 정부지원 프로젝트에 의해 세워진 다른 민간병원들의 사정은 상당히 달랐다. 조사 결과 55%의 병원이 적자운영을 했고, 평균 부채의존도가 99.3%에 달했으며 차관원리금 상환도 전반적으로 저조하여 67%의 병원이 50%의 상환률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의료계는 부산백병원의 성공이 이례적인 경우라고 평가했다.

부산백병원의 성공은 훌륭한 인적자원 덕분이다. 우수한 의료진의 포진은 다른 병원과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부산백병원 성공의 배후에는 장기려 박사와 최하진 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당시 부산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우리를 전폭적으로 도와주었다. 4~5년 동안 수술을 함께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일주일에 한번 직접 진료를 해주시어 많은 후배 의사들의 귀감이 되셨다.

부산백병원을 담당할 의료진 구성은 서울백병원의 지원만으로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의료진은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교수진 선발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최하진 박사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전종휘 초대학장, 성호석, 심재홍, 이순용, 이송희, 김종성, 강창일, 김상효, 정정명, 이영구, 김현찬, 이희철, 홍관희, 주종수 교수 등으로 이들은 백병원 일을 자신의 일처럼 알고 헌신했다. 이런 훌륭한 인재들의 주인의식이 백병원을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항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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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부산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부산백병원을 도와 4~5년 동안 수술을 함께하고 일주일에 한번 직접 지료를 해주어 후배의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인제대학교,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기까지

1979년 서울백병원과 부산백병원을 부속병원으로 하여 인제의대를 설립하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민족의 대학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종합대학 설립은 이제 갓 설립된 의과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요원한 과제였지만 1980년부터 장기발전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첫번째 과제는 학교 부지의 확보였다. 그러나 종합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10만평 정도의 부지를 부산 시내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후 김해와 양산 등지를 알아본 결과 자연경관, 진입로, 부지면적 등 종합적인 사항을 고려해 볼 때, 김해시 어방동 지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논의되었다. 20~30 만평을 목표로 하였지만 주변 지역은 토지 주인들의 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사들일 형편이 안되어 부족한대로 11만평의 현재 김해캠퍼스를 갖출 수 있었다.

학교부지가 확보됨에 따라 학과 증설 계획도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1982년 이사회에서는 교명을 인제의과대학에서 인제대학으로 변경할 것과, 물리, 화학, 생물, 국문, 영문, 일문, 경영학과 등 7개학과 각 40명 정원으로 증설할 것을 결의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문교부에서는 교명 변경안에 대해 1984년 3월 1일부로 인제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라는 통보를 했으며, 학과 증설 안에 대해서도 1984 학년도부터 물리, 화학, 생물 3개학과, 각 4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도록 인가하였다. 이후 매년 학과가 꾸준히 증설되었는데, 1985년 4개학과, 1987 2개학과, 그리고 1988년 7개학과가 신설되었고, 1989년부터 1988년부터 종합대학 ‘인제대학교’로 승격되었다.

2015년 현재 인제대학교는 인술제세, 인덕제세의 건학이념과 정직, 성실, 근면의 교훈 아래, 2015년 현재 5개 대학원(일반대학원, 보건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과 8개 단과대(의과대학, 문리과대학, 사회과학대학, 글로벌경영대학, 디자인대학, 공과대학, 의생명공학대학, 약학대학), 13개 학부, 34개 학과 1만 5천여명이 교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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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981년 3월 2일 인제의과대학 현판식   ②1982년 5월 1일 열린 ‘제1회 의학교육 세미나’  ③인제대학교 전경

백병원, 86 · 88 대회 선수촌 전담병원으로 의료지원 성공

1986년, 우리나라는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했다. 정부는 국제적인 규모의 대회운영을 위해 의료기관에 협조를 요청했다. 아시안인의 범세계적인 축제로서 병원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나 막대한 인력과 장비가 소요되는 만큼 대승적 판단이 요구되었다. 서울백병원은 최대 인력 파견과 실질적 지원이라는 큰 결단을 내렸다. 백병원은 인력면에서 총 247명 중 민간병원 중에서는 최대 인력(71명)을 지원하였고, 전체 장비지원 규모(5억8700만원) 중 49.2%(2억8,900만원), 전체 약품지원규모(6,300만원)중 41.3%(2,600만원)에 이르는 실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서울백병원은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뿐 아니라 그 경험과 경력을 살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일을 맡게 된다. 지난 아시아경기대회 때도 선수촌병원을 운영하여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있었지만 경험을 살려 거국적 행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두 대회의 선수촌 병원을 모두 전담하였고, 부산백병원도 부산에서 진행되는 요트경기 등 해상경기의 의료를 맡게 되었다. 선수촌 전담병원의 원장은 당시 부의료원장이었던 김용완 박사가 맡았다.

의료지원은 성공적이었다. 백병원은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크게 일조하였고 충분히 보람은 있었으나, 병원 자체의 인적 재정적 부담은 불가피하였다. 정부측 기록만 의존한다 해도 물자 및 장비에만 최소 6억4,000만원 이상의 경비를 제공한 셈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회에 참가한 외국인 선수 및 임원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고, 정부측에서도 의료지원팀에 높은 평가를 해주었다. 또 86 · 88대회를 거치면서 의무지원 분야에서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집적(集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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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②서울백병원은 1986년 9월5일부터 10월8일까지 민간병원중 최대 인력(71명), 장비, 약품 등을 지원하며 선수촌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③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9월3일부터 10월5일까지 선수촌병원을 운영하였으며, 외국인 선수 및 임원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백병원은 재정적 부담은 있었지만 86 · 88대회의 성공적 의무지원을 통해 백병원의 높은 의료기술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상계백병원의 탄생

백병원은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크게 일조하였으나, 병원자체의 인적 재정적 부담은 불가피하였다. 선수촌 병원에서 사용하였던 장비의 재활용과 급증하는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병원의 건설을 결심하고, 새로운 부지를 모색하던 중에 상계지역에 아파트촌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공개입찰을 통해 병원부지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계지역의 병원부지는 경쟁입찰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낙관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선수촌 병원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기로 하는 정부안이 제시됨에 따라 백병원이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서울 노원구 상계, 중계 및 하계동 일대에 당시까지 수도권 최대의 아파트 단지 조성이 시작되었는데 이 지역의 종합의료 시설용지 2,000평을 경쟁 입찰을 통해 확보하였다. 이 지역은 새로 조성되는 아파트뿐 아니라 큰 병원이 거의 없는 서울 동북부, 의정부, 동두천 및 포천 지역의 의료지원을 위해서도 병원의 입지는 좋은 편이었다. 1988년 1월 18일 서울시로부터 병원 건축허가를 얻어 상계백병원(초창기의 명칭은 북서울백병원)을 착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86아시아경기와 88올림픽 때 사용했던 의료장비의 효율적 사용과 경비절감이 가능해졌고, 병원의 전산화작업 등 대회에서 얻은 경험을 병원운영에 적용할 수 있었다. 또한 양 대회를 통해 훈련된 지원인력들 중 많은 의료진이 상계백병원 창립성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대지 2,300평, 지상 11층, 지하 4층 규모로 20개 진료과목을 갖추어 착공 1년 7개월만인 1989년 8월 14일 인제대학교 부설 상계백병원으로 개설 허가증을 받고 8월 15일부터 본격적인 진료에 들어갔다. 첫 삽을 뜬 지 약 1년 반만의 일이었고, 부산백병원을 개원한 지 10년만이었다. 8월초부터 무료진료를 실시하여 지역주민과의 거리감을 좁혔던 상계백병원은 개원 첫날 외래환자 306명, 입원환자 30명을 기록하였다.

상계백병원은 개원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는 초대 원장을 맡은 함태영 박사의 노고도 컸지만 지역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 병원이 아파트 밀집지역에 위치해 있는데다, 의정부 동두천, 구리 등 서울의 동북부 지역에 대학병원 급의 대형 종합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개원과 동시에 내원환자가 폭주하였다.

응급실 진료 실적만을 보더라도 이 지역의 의료수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상계백병원은 응급실에서만 개원 첫 해에 30,000명을 진료하였으며 현재는 60,000여명에 이르고 있어서 전국에서 응급실 내원환자가 가장 많은 병원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상계백병원은 완전 전산화 작업을 끝내 21세기형 정보화 병원으로 다른 병원을 선도하였다. 상계백병원은 1989년 450병상으로 개원한 후 증축공사를 통해 1992년 505병상, 1997년 650병상, 2012년 현재 지하3층 지상17층 704병상으로 동북부 최고의 병원으로 계속적으로 도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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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②1988년 1월 18일 상계백병원 착공식   ③1989년 8월15일 상계백병원 개원

이혁상 교수팀, 국내 최초 절제 불능 간암환자 간이식 성공

지금은 편안하고 안전하고 수익만을 쫓는 시대 탓에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 수술을 많이 하는 과들이 비인기 진료과로 전락(?)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외과는 의료계의 발전을 이끌어가고 있는 최고의 진료과이다. 백병원의 시초가 백인제외과의원이고, 백인제 박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6 · 25 이전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의로 명성을 날렸다. 위암, 간, 담도 외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위 및 십이지장 수술은 최초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백병원이 외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 바로 1992년 서울백병원 외과 이혁상 교수팀의 ‘국내 최초 성인 간암환자 간이식 성공’이다. 이혁상 교수는 1992년 3월 18일 오후 11시, 8시간 30분에 걸쳐 말기 간경변을 동반한 간 우엽 전체와 좌엽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거대 간암환자의 간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환자는 거부반응이나 간염 재발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은 상태로 수술 78일만에 건강하게 퇴원하였다. 국내 최초로 성공한 절제 불능 간암환자에 대한 간이식은 우리나라 장기이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국민병으로 일컬어지는 B형 간염 환자 및 치료 불능의 간경변 및 간암 치료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의학계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서울백병원은 모두 9차례 간이식 수술을 시행하였으며, 이러한 큰 업적으로 그해 대한외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참석한 의사들로부터 기립박사를 받았다.

이러한 간이식 성공의 역사를 이어받아, 지난 2010년에 개원한 해운대백병원은 개원때부터 ‘생체간이식센터’를 중점육성하기 위해 최첨단 장비와 시설, 전문코디네이터를 통한 환자중심의 원스톱서비스, 유능한 의료진 양성 등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간이식 분야에서는 뇌사자가 드문 우리나라의 현실상 뇌사자의 이식이 아닌 가족 또는 친족간 주로 이루어지는 생체 간이식 분야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간이식수술은 간경변에 의한 말기 간부전 환자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부여하는 유일한 치료방법인 만큼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백병원 창립이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현대의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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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992년 3월 18일 ‘국내 최초 성인 간암환자 간이식 성공’   ②이혁상 교수의 간인식 성공은 의학계와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간경변 및 간암치료, 장기이식의 새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IMF, 그리고 일산백병원의 개원

일산프로젝트가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10월경이었다. 이미 주요 병원들이 인천, 분당, 평촌, 중동 등 서울 근교 신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대학병원 규모의 신규병원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부천, 하남, 일산 등지에 대한 정부의 토지분양공고를 주시하고 신규병원의 입지여건을 타진해보고 있던 중에, 마침 일산신도시 대화동 일대에 입지조건이 우수한 부지를 발견하였다. 일산에는 이미 의료보험관리공단 일산병원과 국립암센터가 시공 중에 있었고 동국대병원도 시공을 예정하고 있었지만, 일산백병원의 수입에 영향을 주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일산구를 포함한 고양시는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22.8%에 이를 정도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한 반면, 1997년까지만 해도 인구 72만의 고양시에 2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은 고작 1개뿐이었다. 이웃 김포시나 파주시의 병원현황은 더 열악하였다. 거기에 일산은 김포공항 및 인천국제공항과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국제적인 교류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북 교류가 활성화될 경우 대북 의료지원의 요충지이자 대북 의료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될 여지가 충분했다. 결국 1997년 9월 9일 일산백병원을 착공하였다.

그런데 일산백병원을 착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가 닥쳐 1997년 11월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금리가 폭등하고 금융기관이 폐쇄되는 등 자금회전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일산백병원도 마찬가지 상황에 직면하여 신규 차입이 중단되고 기존 차입금을 상환하라는 압력까지 잇따랐다. 이로 인해 주위에서는 일산백병원 공사가 중단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는 공사를 강행했다. 우선 조금이라도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주거래업체인 ㈜효성개발이 시공하청업체의 지정을 전담했던 기존 공사 계약방식을 학교법인 인제학원과 직접계약을 맺는 개별공사 계약방식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일반적인 공사현장에서는 공사가 중단되는게 다반사였기 때문에 일산백병원 시공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하청업체들은 수익이 나지 않는다 해도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법인과 각 업체가 직접 계약하는 이러한 방식은 확실히 효과를 거두어 원가의 30% 이상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IMF 외환위기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급여가 일시 동결되었기 때문에 병원의 순이익은 오히려 일시 증가하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은행대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기업평가주식회사에서 시행한 <일산백병원 타당성 검토보고서>는 일산백병원의 수익성을 보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은행으로부터 600억의 차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국 모두에게 위기였던 IMF 외환위기 속에서 오히려 백병원은 성공의 초석을 마련하고 있었다.

1999년 12월 10일, 드디어 일산백병원이 개원했다. 고양시 일산구 대화동 2240번지 일대 3400여평의 부지에 지하6층, 지상12층, 600병상의 병원이 착공 2년 3개월만에 완공된 것이다. 의료진 850명에 내과 등 24개 진료과목이 개설되고 이비인후과 안에 난청환자 치료를 위한 인공와우이식센터를 두는 등 정밀진단과 처방을 위해 50여개의 전문 진료과목을 별도로 운영하였다. 또한 PACS(의료영상 전달 및 전달 시스템), OCS(처방전달 시스템) 등 병원 업무의 완전 전산화와 당일 진료 및 수술이 가능한 외래 수술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경계 질환의 종합진료를 위해 개설한 신경센터는 국내 최초로 차세대 방사선뇌정위 수술기구인 노발리스를 도입, 세계적으로 시술되고 있는 무혈수술을 할 수 있게 된것은 물론 전기생리학적 진단장비 등으로 파킨슨병 등 운동장애질환 치료도 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일산백병원의 성공사례는 사립병원과 국립병원의 효율성을 대비시키는 계기가 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산백병원은 개원후 일산신도시의 종합병원 시대를 주도하며 경기북부지역 의료서비스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난 2010년 8월 증축하여 현재 700여 병상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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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997년 9월 9일 일산백병원 기공식을 가지고 IMF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원하였다. ②일산백병원은 지하6층 지상10층 600병상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1999년 12월 10일 일산백병원 진료를 시작했으며, 이로써 일산지역 종합병원 시대가 활짝 열렸다. ③일상백병원 개원1주년 기념행사

동래백병원의 개원과 폐쇄

일산백병원을 개원하고, 처음부터 백병원을 하나 더 개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예기치 않게 부산시 금정구의 한미병원을 인수하게 되었다. 1985년 187병상 규모로 개원한 한미병원이 자리한 금정구는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와 가까워서 교통사고 환자가 많고, 병원인근에 대형 아파트가 밀집해 있어 부산시 전체의 10% 규모인 인구 30만을 차지하고 있으며, 울산, 양산과 인접해 있어 의료 실수효가 50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1999년 11월 600병상의 침례병원이 금정구에 들어섬에 따라 한미병원의 외래환자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또한 외환위기이 여파와 2000년 의약분업 시행 등으로 경영수지가 악화되는 가운데 신규투자나 우수인력 확보 등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채가 날로 증가했다. 더욱이 경영자인 조성원 원장은 외과의사로서 직접 수술은 물론 야간 · 휴일당직을 도맡아 왔으나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진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병원을 인수할 경영자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병원의 인력과 부채를 승계하고 병원을 회생시킬 수 있는 곳은 백병원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증여대상을 인제학원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인제학원은 2001년 2월초 한미병원 직원의 80%에 대한 고용승계와 자산과 부채를 모두 인수하는 조건아래 무상기증에 합의하는 계약서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내부시설 공사를 시작하였다. 명칭을 동래백병원으로 바꾸어 2001년 3월 15일부터 첫 진료를 시작하였으며, 지하2층, 지상5층의 11개, 진료과 221병상을 갖추게 되었다. 개원 첫해 지료실적을 살펴보면 개원 첫달 동안 일평균 외래환자가 161명에서 2001년 12월에는 333명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진료수익 면에서도 한미병원 인수시보다 1.5배 가량의 증가했다.

병원을 인수하여 운영한지 9년만인 지난 2010년 1월 31일 동래백병원을 폐쇄하였다. 2010년 3월 25일 해운대백병원 개원에 따른 조치였는데, 동래백병원 폐쇄에 따른 교직원의 고용 승계 보장 부분도 원만히 마무리하였다. 다른 신규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해운대백병원의 경우도 간호조무사 등을 외부 용역업체에서 공급받기 때문에 간호조무사 등 일부 계약직 직원들의 고용승계는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었으나, 동래백병원 전 교직원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인제학원 소속의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해운대백병원의 개원으로 동래백병원이 문을 닫았지만 동래백병원은 지난 9년 동안 부산북부권의 중심병원으로 동래와 금정지역 주민들의 건강지킴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동북아시아 의료 허브,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

부산의 경우, 부산백병원을 비롯한 부산대, 동아대, 고신대학교 병원 등 주요 대학병원들이 전부 서부산권에 집중되어,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신흥 주거지역인 해운대지역 주민들은 ‘종합병원 유치위원회’까지 만들만큼 대형의료기관 유치를 간절히 원했다. 2010년 3월 25일에 개원한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은 지하4층, 지상16층 규모의 초현식 건물에 1004병상 규모로, 그동안 의료취약지역이었던 동부산권을 비롯해 울산을 포함한 동부 경남권의 의료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해운대백병원은 한국사립병원의 선두주자인 백병원의 80여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가장 최근에 개원한 대학병원인 만큼 최고의 시설과 각종 첨단 의료장비, 국내외 유수의 의료기관에서 온 최고 의료진을 구성하여 세계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최근 교통망의 발달로 보다나은 의료서비스를 받기위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가고자 하는 지역의 환자들을 되돌리고, 부산 해운대가 가지고 있는 천혜의 관광자원과 연계하여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는 부산 의료관광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운대백병원은 각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있어 최상의 진료를 위해 의료진 간의 협진체계를 바탕으로 원스톱서비스가 가능한 전문진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응급환자의 이송을 위한 구급헬기 이착륙장과 24시간 이내에 응급수술이 가능한 중증외상센터, 장기이식센터, 로봇수술센터를 비롯하여 암통합센터, 척추센터, 감마나이프센터, 심혈관센터, 소화기센터, 뇌혈관센터 등의 전문진료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시설 못지않게 최고의 진료성적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지방에서 최초로 도입된 ‘감마나이프 퍼펙션(Gamma Knife Perfexion)‘비롯하여 최첨단 방사선 암치료 장비 ‘래피드 아크(Rapid Arc)’, ‘멀티슬라이스 컴퓨터 단층촬영기(640 MSCT)’ 등 가장 최첨단 장비를 보유하며, 부산ㆍ경남지역의 첨단의료를 선도하고 있다.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은 부산 동부지역의 유일한 종합의료기관으로서 진료, 봉사, 연구에서 그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부산,울산,경남의 지역민들의 ‘백병원’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최고의 의료진과 첨단 의료장비를 바탕으로 수준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동남권과 아시아권, 더 나아가 세계로 향하는 병원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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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지하4층, 지상16층, 1,004병상으로 개원한 해운대백병원은 암센터, 뇌혈관센터, 심혈관센터, 소화기센터, 간질센터, 조혈모세포이식센터, 척추센터 등의 전문센터에서 맞춤형 원스톱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